Gangneung Danoje Festival
Gangneung Danoje Festival
단오는 음력 5월 5일로 설, 한식, 추석과 함께 우리나라 4대 명절 중의 하나로
(端)은 ‘처음’, ‘시작’이라는 말이고 오(午)는 ‘초닷새’라는 뜻이다.
조상들은 단오를 1년 중 양(陽)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날로 여겨 으뜸 명절로 여겼다.
강릉단오제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역사적으로 보면 강릉은 기원전 120년경 부족국가였던 동예가 있던 곳으로
동예에는 ‘무천’이라는 제천행사가 있었는데 10월에 추수가 끝나면 하늘에 감사하는 제사를 지내고 축제를 했다고 전해진다.
학자들은 강릉단오제가 이런 제천 행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강릉에서는 개화기 이전까지 대성황사에서 열두 신을 모셨다고 전한다. 강릉단오제에서는 현재에는 대관령산신, 대관령국사성황신, 대관령국사여성황신의 세분을 모신다. 이 세신들은 모두 역사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실제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허균 성소부부고]
김유신이 젊었을 때 명주에서 공부했는데 산신이 검술을 가르쳐 주었고, 죽어서는 대관령의 산신이 되어 지금도 신령스런 기이한 일이 있기에 고을 사람들이 해마다 5월 초하루에 천을 길게 늘어뜨려 만든 괫대와 향기나는 꽃을 갖추어 대관령에서 맞이해 명주부사에 모신다.
신라때 장군 김유신은 많은 설화에 등장하고 있으며 강릉에는 김유신을 모시는 화부산사라는 사당도 남아 있다. 설화속의 이야기지만 김유신은 역사적인 업적 외에도 비범한 능력을 지닌 인물로 추앙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산 마을에 사는 한 처녀가 석천이라는 샘에 가서 물을 한바가지 떠 마셨는데, 그 물 안에는 해가 들어 있었다. 그 후 처녀는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처녀의 집에서 아비 없는 아이를 낳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 뒷산 학바위 밑에 몰래 버렸다. 며칠 뒤 처녀는 아이기 이미 죽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학바위를 몰래 찾아갔다. 그런데 여러 마리의 학들이 붉은 알약 같은 열매를 아이의 입에 넣어 주면서 날개로 감싸고 있었다. 이를 본 처녀와 가족들은 하늘이 보호하는 아이라고 생각하여 집으로 데려와 잘 키웠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아이는 중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 유명한 승려가 되었고 이 사람이 바로 범일이다. 범일은 그 후 고향 강릉에 돌아와 학산에 굴산사를 지어 불법을 전하고 지금 내곡동에 탑만 남아있는 신복사라는 절도 창건했다고 전하며 범일은 왕의 스승으로 초빙되어 국사라는 칭호를 얻게 되어 범일국사라고 불리게 된다. 강릉사람들은 범일국사가 죽어서 대관령국사성황신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지금의 홍제동에 있는 정씨집안에 시집 갈 나이가 된 딸이 있었다. 하루는 아버지 정씨 꿈에 대관령 국사성황신이 나타나 딸에게 장가를 들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사람도 아닌 신에게 딸ㅇㄹ 시집보낼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런 데 얼마 뒤 국사성황신이 호랑이를 보내 딸이 비석처럼 선 채로 죽어 움직이지 않았다. 놀란 정씨 부부는 국사성황신에게 딸을 아내로 바치겠다고 약속했고 그리고 화가를 불러 딸의 그림을 그려 붙였더니 딸의 몸이 비로소 땅에서 떨어졌다.
이 날이 음력 4월 15일이었는데 사람들은 이 날을 대관령국사성황신과 정씨처녀가 결혼한 날로 여겼다. 그래서 지금도 4월 15일 이면 대관령에 계신 국사성황신을 시내의 국사여성황사까지 모셔와 함께 제례를 지낸다.
동예에서는 해마다10월에 신께 제사하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데 이를 무천이라고 한다.
935년에 강릉사람 왕순식이 왕건(태조)을 도와 신검을 토벌하러 가는 길에 대관령에서 산신께 제사를 지냈다.
영동민속, 매년 3,4,5월 중에 날을 받아 무당들이 산신을 맞아 신에게 제사한다.
부자들은 제물을 말바리에 싣고 가난한 사람은 이고 지고 대관령에 올라가 제사를 차리고 피리불고 북장고를 치고 뜯으며 연삼일 동안 마음껏 취한 연후에 집으로 돌아가 비로소 물건을 사고판다. 제를 지내지 않고는 사소한 것도 남에게 주지 않는다.
나는 명주(강릉의 옛이름)에 있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5월 초하룻날 대령신을 맞이한다 하기에 그 연유를 우두머리 향리에게 물으니 이렇게 말했다. “대관령신이란 바로 신라 대장군 김유신 공인데 죽어서는 대령의 산신이 되었다. 그래서 고을 사람들이 해마다 5월 초하룻날 괫대와 꽃을 갖추어 대관령에 가서 신을 맞아다가 명주부사에 모신다. 내가 그날 가서 직접 보니 김유신이 살아서 업적만이 아니라 죽어서도 사람들에게 신령스러운 존재로 추앙받으니 기록할만한 일이다.
강릉에서는 성황사에 제례를 올리는 이외에 별다른 풍속이 있었는데 매년 4월 보름에 강릉부에서 임명된 호장이 먼저 사당 앞에 나가 아뢰고, 남자와 여자 무당으로 하여금 살아있는 나무 가운데서 신이 내린 나무를 찾아 모시고 오라 시킨다. 갑자기 나무 하나가 바람이 불고 지나간 듯이 나뭇잎이 저절로 흔들리고 마침내 신령이 그 나무에 내린 것으로 알고 나뭇가지 하나를 잘라 건장한 장정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고는 이를 국사라고 하였다. 이 신목을 모시고 대관령을 내려와 강릉시내 성황사에 안치해 둔다. 5월 5일무당과 광대들이 화개를 앞세우고 잡희를 하면서 놀다가 해산하고 이튿날 성황사에서 신목을 태웠다. 이 행사는 매우 오랜 풍속이고, 이를 하지 않으면 비바람이 곡식에 피해를 주고 금수의 피해가 있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