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연구가 재미있는 것은 크게 제한이 없다는 점이다. 어느 순간, 민속은 과거가 되었지만 사실 민속은 현재 진행형이다. 민속은 늘 열려있고, 역사와 문학 그리고 삶의 현장이 그 무대였다.
일각에서 확실한 물증 없는 추론이라고 폄하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어떤 자료가 100%를 보장할 수 있겠는가. 수백 년, 수천 년 전에 일을 본적이 있는가. 다만 합당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면 그 이야기를 수용할 뿐이다.
강릉에 전하는 ‘창해역사’ 신화는 이런 면에서 파고들만 하다. 한마디로 스펙터클하고 재미있다. 중국 박랑사에서 장자방과 함께 거행한 진시황(秦始皇) 철퇴 암살사건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강릉 옥천동 주민들은 거사를 기념하고자 유허비를 세웠다. 다른 하나는 창해역사 덕분에 강릉지역 고대사가 오롯이 선 것이다.
홍만종의 ‘순오지’에 실린 신화 중에 예국 관련 기사만 요약하면 예국의 한 노구가 시냇가에서 박만한 알 한 개가 주워 집에 두었더니 알에서 남자 아이가 나왔는데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나이 6~7세에 키가 8척이나 되었고 힘이세었다, 얼굴빛이 검다하여 여용사라고 불렸는데 예국의 사나운 호랑이를 한주먹에 죽였다. 국가에서 만 근이나 되는 큰 종을 만들었으나 움직이지 못하자 여용사가 단숨에 번쩍 들어 옮겨 놓았다. 임금이 옆에 두고 상객으로 대우해 주었다.
신화의 현장은 예국이다. 예국은 동예의 남쪽 끝자락 강릉에 존재했었다. 정확한 위치를 꼽는다면 옥천동 일원으로 추측된다. 창해역사의 짧은 신화는 강릉 고대사의 축약본이다. 냇물을 따라 등장한 여용사는 젊었고, 예국은 노쇠하다. 여용사에게 죽임을 당한 호랑이는 예국의 신으로 멸망을 상징한다. 그 자리에 새로운 문명의 상징인 종이 선다.
현실에서 창해역사는 호가리(虎街里·옥천동)의 성황으로 좌정한다. 이는 예국의 제천의례 무천이 동제로 격하되고, 새로운 국행의례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국을 점령한 세력은 신라로 보인다. 창해역사의 탄생이 신라의 왕 박혁거세, 석탈해왕 등과 같이 난생계(卵生系)라는 점 뿐 아니라 물길을 활용하는 등 신라계라는 심증을 찾을 수 있다.
강릉지역 지배층의 교체는 공동체의례가 10월 무천에서 5월 단오로 이동하는 결정적 단서이다. 5월 5일은 신라의 국행제가 열리는 날이었고, 가야는 단옷날 제사를 가장 크고 중요하게 여겼다. 성호 이익은 우리 민족의 성묘 풍속을 가야의 단옷날 제사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정도로 단오 제사를 중요하게 보았다.
신화의 행간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강릉단오제의 주신 ‘국사’는 용어로 볼 때 불교와 관계 깊지만 민간신앙 차원에서는 관련 없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기왕의 연구에서는 산신이나 천신보다 격이 높은 신의 음차로 보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구수, 국시, 구지 등으로 풀어 산 정상에서 강림하는 천신을 의미한다. 여기에 청안이나 안변 등에서 국사신은 부부신이다. 그렇다면 국사, 산신, 국사여성황 등의 관계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넓게는 강릉단오제를 골매기 신앙으로 보기도 하는데 골매기 신은 보통 입향조를 모신다. 그렇다면 예국을 멸망시킨 창해역사가 입향조에 해당하지만 옥천동 성황으로 만족한 것으로 보아 더 높은 층위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구전설화에 김유신이 군대를 이끌고 강릉에 주둔하면서 말갈을 물리쳐 주민들이 김유신에게 제사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김유신은 강릉에 온 적이 없다. 그렇다면 김유신을 따르는 화랑의 무리들이거나, 가야계 군사들이 김유신의 깃발아래 강릉에 주둔했을까? 또 신화에 등장하는 왕의 의미는 무엇일까? 강릉일원에서 왕의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은 김주원이다. ‘왕이 곁에 두고 아꼈다’의 의미는 강릉에 신라계와 가야계 세력의 공존을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신화가 갖는 특징 중 하나는 오래된 과거사 건국, 전쟁, 위인들의 업적을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로 꾸며서 후세에 전달하는 기능이다. 창해역사 신화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강릉단오제 기원에 대한 단초를 찾았다.
민속은 시간은 흐를수록 곁가지를 떨쳐버린다. 오직 인간이 추구하는 핵심만 전승하는 것이 민속의 전형이다.
2022.05.29